혜존(惠存) - 이경임
낯선 시인의 이름으로 시집이 왔다 / 사십 년 빈한하던 이름 뒤 혜존이라는 / 민망한 말씀의 겸손 얹혀 있어 부끄럽다 / 첫 시집의 감동을 함께 나눌 이들이 / 일면식 하나 없어도 기꺼운 까닭인지 / 시인의 두근거림이 행간마다 살아있다 / 먼 뒷날 내 쓸쓸한 별자리에 이름 하나 / 가까스로 얻으면 기쁘게 혜존이라 / 덧붙일 사람의 집이 너무 멀어 아득한 날
어느 시인에게 받은 아무개 혜존이란 말에 감동한 시가 있는가하면, 또 다음 누리집에는 “이미 책을 낸 사람들에겐 책 내는 일이 어려운 게 아닌지 몰라도 자기 이름을 당당히 드러내며 받는 이에게 '혜존'이라고 적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나도 “ 혜존”이라고 사인한 책을 받고 싶다.”라는 글도 있다.
누구든 남에게로부터 책 한 권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지금 책장 곁에 있다면 받은 책을 꺼내 먼지를 털고 첫 장을 열어볼 일이다. 그러면 거기 얌전하게 “혜존(惠存)”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보통 책이나 논문 등을 증정하면서 받는 사람 이름 옆에 한자로 “惠存”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쓰는데 대관절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먼저 일본국어대사전<大辭林>에서는, “けいそん【惠存】:《「けいぞん」とも》お手元に保存していただければ幸いの意で、自分の著書などを贈るときに、相手の名のわきや下に書き添える語。”라고 되어 있다.이의 번역은 일본국어사전을 베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된다. 여기엔 “혜존(惠存, 케이손, 케이존이라고도 함) :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자기의 저서나 작품 따위를 남에게 줄 때에 상대방의 이름 옆이나 아래에 덧붙여 쓰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반듯한” 정의 탓에 우리는 여태껏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저서를 남에게 줄 때 이 말을 써왔던 것이다. 마땅히 받는 사람은 자기의 이름 옆에 혜존이라는 말이쓰여 있을 때 기뻤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며 나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은 사람은 위 예문처럼 “혜존”이란 시를 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또 그 시인의 서평을 쓰느라 바쁘다.
“혜존(惠存)이란 말을 처음 사전을 뒤적이던 때가 근 25년 시간이 흘렀다.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란 뜻이다. 이경임 시인의 시집 ≪프리지아 칸타타≫를 받고 초심에 깃든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의 씨앗을 땅에 묻고 가꾸는 일이다. ‘혜존’이란 이경임 시인의 시가 말해주듯 "먼 뒷날 내 쓸쓸한 별자리에 이름 하나 / 가까스로 얻으면 기쁘게 혜존이라 / 덧붙일 사람의 집이 너무 멀어 아득한 날"을 기약하는 일 같다. 가까이 있으면 마주앉아 차 한 잔 앞에 놓고 기나긴 여정의 사투 끝에 출간된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송할 일을 스스로 혜존(惠存), 이 한마디로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글을 쓰며 받는 가장 기쁜 선물, 님 혜존, 그 글씨를 책장 앞머리에 쓰는 기쁨이란 내 마음의 집을 지어 주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이경임 시인으로 하여 나도 다시 초심을 얻고 있다 .- 임영석의 시조 읽기-
시평을 정리해보면 “혜존”이란 “글을 쓰며 받는 가장 기쁜 선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혜존이라고 책장 앞머리에 쓰는 기쁨이란 내 마음의 집을 지어 주는 마음이다”라고표현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신주 모시듯 써온 “혜존”이란 말에 대해 이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때가 왔다.
2009. 2. 16 자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는 “혜존”에 대한 말이 일본말이라는데 써도 되냐는 누리꾼(네티즌)의 질문이 올라와 있고 이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이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말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며 자기의 저서를 남에게 줄 때 받는 사람 이름 옆에 써서 ‘잘 받아주십시오.’란 뜻으로 쓰인다.”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다. “아무 문제 없는 말이니 그냥 쓰라"는 식이다.
문제는 국립국어원의 이러한 답변에 “김봉규”라는 분이 올린 “혜존”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이 분의 글은 국립국어원의 “모르쇠”에 견주면 논리 정연하다. 이분의 주장에 따르면, <혜존, 惠存>은 ≪한국문집총간≫ 자료에서 20여 곳에 나타나는 말로 <이 책을 받는 것이 은혜로워·‘惠’ 잘 보존 ‘存’하겠다>는 뜻이며 한자로는<受此冊爲感惠故保存以重>라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해석하면 우리나라 선비들이 오래전부터 써 왔던 말로써 책을 받는 사람이 ‘귀한 책을 주셨으므로 잘 읽고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선비들이 주고받던 책이란 <문집>을 말하며 <문집>이란 당사자가 세상을 하직하고 난 뒤 그 후손이나 제자들이 선조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 발간하는 것을 말한다고 풀이해주고 있다. 그래서 <문집>은 <사후(死後) 문집>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고한다. 살아있을 때는 문집을 내지 않는 것이 옛 선비들의 전통관례였으며 살아있으면서 문집을 내면 <생문집(生文集)>이라 하여 천한 일로 배척했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다.
보통 문집은 책 제목이 없는데 이를 받은 사람이 겉표지에 문집이름을 적고 속표지에는 누구에게서 언제 받았는지를 적은 다음 책을 준 사람 이름 끝에다 <은혜롭게 주시기에[惠] 잘 보존[存]하겠다>는 뜻인 <혜존>이라는 말을 적어 고마움을 나타내던 것이 우리겨레의 “혜존”이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 뒤 우리말이 생겨난 바탕[語源]과 흐름[變遷], 말뜻[語意], 쓰임새[用處]를 챙기지 못하는 과정에서 일본말의 영향을 받아 “이 책을 드리오니 잘 보존해주시면 고맙겠다.”라는 일본식 “혜존”을 따르게 되었으니 거꾸로 되어버린 꼴이다.
이치로 따져 봐도 자기가 쓴 책을 잘 보존해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하게 말하면 건방진 부탁이다. 일본과 서양의 문화가 물밀듯 밀려오면서 살아있는 사람의 저서(著書)가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 겉표지는 아예 인쇄를 하게 되었으며 속표지 첫 장을 넘겨 일본사람들 하듯 “제 책을 잘 보존해주시오 라는 뜻의 '惠存'”을 마구 남용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숫제 강요된 부탁이 아닌가? 우리 겨레는 남에게 자신의 저서를 잘 보존하라고 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그런 뜻도 모르고 지금도 갓 졸업한 대학생이 논문을 교수에게 드리면서 ‘ 교수님 惠存’이라고 쓰고 있고 교수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든다. 시인들은 "惠存“을 노래하고 평론가는 이에 박자를 맞추는 게 오늘 우리 모습이다. 나라를 잃고 가시밭길을 걸어오다 보니 조상이 쓰던 좋은 말들을 내어주고 이상한 말들을 들여다 쓰면서도 아무런 자기반성이 없는 게 또한 우리다. 그래도 국민이야 모르니까 이해한다지만 이를 바로잡고 순화시키고 고운 우리말을 장려해야 하는 국립국어원에서 “이 말이 일본말이라는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으며 남에게 책을 줄 때 써도 무방한 말이다.”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惠存>이 그렇게 복잡한 말이라면 잠시 접어두고 다른 우리말은 없을까?”를 연구해보자. 요즈음 탈북자란 말이 새터민으로 바뀌었다. 참으로 고운 말이다. 새로 우리의 곁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왜 우리는 진작 못했던 것일까? 그들을 바라다보는 시각에 사랑이 없었기에 ‘탈북자’란 말을 오래도록 썼던 것으로 여겨지며 ‘혜존’도 마찬가지다. 작가 한승원은 붓펜으로 멋들어지게 “당신이 가진 빛깔로 우주를 색칠하십시오.”라고 책장 앞에 써서 책을 건넸다는 말을 들었다. 역시 대문호답다. “惠存”의 뜻도 모르면서 줄기차게 대물림으로 이어 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색깔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어 책을 건네면 어떨까? “***님께, 제가 가슴앓이로 쓴 글입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님께, 바람 부는 날, 마음 심란할 때 끄적였던 부족한 글입니다.”“***님께, 아직 연구 논문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만 더욱 힘내겠습니다.”이런 아름답고 가슴 찡한 말을 책 앞장에 써서 드리는 것은 “惠存”보다 못한 일일까?
남에게서 책을 받아든 사람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잘 읽겠다는 뜻의 ‘혜존’이 일본식 ‘혜존’으로 둔갑하여 “내 책을 잘 받아 간수하시오.”로 되어 버렸으니 주객전도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리라.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손을 대기가 쉽지 않지만 먼저 우리부터라도 책을 써서 상대에게 선물할 때는 “혜존”을 버리고 나름대로 번득이는 슬기로운 말 또는 정감 어린 말을 골라 써서 건네는 습관을 만들자. 그러다 보면 더디더라도 고쳐질 날이 올 것이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이윤옥(rhsls645@hanmail.net) 퍼온글입니다. |